*임신
*독백
*짧
*정신없이 끝
‘도망갈까.’
공포심이 온 정신을 잡아먹고 있었다. 등 뒤로 타고 올라오는 오한과 소름에 온 몸의 근육이 바짝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피부 안쪽을 쫙 조이고 있는 근섬유가 긴장감 탓에 경련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샌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침착하게 생각해야해. 샌즈는 자신을 다독였다. 짐을 챙길 것도 없이 지금 당장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 가득 차올랐으나 조바심 탓에 잘못된 선택을 내렸다간 모든 게 끝장이었다.
숨을 꾹 눌러 참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호흡이 가빠져 있었다. 벌벌 떨리는 손끝은 주먹 안에서 움찔거리고 턱 끝을 흐르는 식은땀은 자신의 좋지 못한 버릇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음을 알렸다. 토할 거 같아. 샌즈는 빨간 두 줄을 그리고 있는 테스터기를 움켜잡았다. 손 안에 가득 찬 땀방울이 자신의 상태를 알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불가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아니면 이런 일이 가능한 거냐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한탄을 해볼까. 무엇을 택하든 현재의 상황을 타파할만한 묘안도, 혹은 제 몸을 집어삼키는 불안감을 떨쳐낼 용기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하얗게 비어버린 머릿속으로 자꾸만 원망과 슬픔이 새어 들어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이겨낼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깊은 시름에 잠겨있던 샌즈는 점퍼 안으로 테스터기를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기증이 일어 잠시 휘청였지만 쓰러지지 않고 버텨냈다. 긴장으로 어깨가 굳은게 느껴지면서도 이상하게 다리만큼은 풀려있었다. 혹시 이것도 임신의 여파인가?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임신증상에 대한 생각들이 하나 둘 작은 머리 안으로 차올랐다. 임신 사실을 알아내자마자 모든 걸 그것과 연관 짓다니.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임신. 임신이라니. 웃기지도 않지. 샌즈는 파, 하고 자조적인 웃음을 토해냈다.
관계는 일주일에 적으면 3번. 많으면 5번 정도였다. 한 번 할 때 보통 세 시간. 남들보다 조금 길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남들의 섹스라이프에 까지 신경 쓸 만큼 샌즈는 밝히는 남자가 아니었고 관심도 없었다. 아니면 혹시 지속적인 하드 플레이 탓인가. 정액을 오랫동안 몸에 머금고 있었던 탓은 아닌가. 그럴 리가 없지. 그럼 모든 동성 커플이 임심이 가능하게.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멍청하고 의미 없는 생각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자신에게 찾아온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원인을 더듬는 것뿐이다. 남자도 임신이 가능하다고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기사를 본 적은 있었지만 그게 설마 저에게도 가능한 일 일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머릿속에 사는 쥐 한 마리가 시끄럽게 소음소리를 내며 머릿속을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샌즈는 걸음을 옮기다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공포심이 정신을 갉아먹는다. 정신의 고통은 고스란히 몸으로 이어져 멀쩡하던 육체가 고장난 로봇처럼 삐그덕삐그덕 시끄러운 소음소리를 냈다. 고장난 육체에선 물이 흘렀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물방울들이 지면을 적시고 땅을 짚는 손 등까지 적셨다. 숨이 막혀. 감당 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려고 하면 겉은 멀쩡한 육체가 아직 남아있는 이성을 불러들여 울부짖을 수도 없었다.
모든게 엉망이었다. 머릿속 한 켠에선 온 몸이 갈갈이 찢겨지는 고통을 상상했고 한 켠에선 차분하고 냉정한 이성이 현실을 떠올렸다. 샌즈는 감당 할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무의식 적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다 멈칫하고 말았다. 깨닫고 나서는 울음대신 웃음이 터져나왔다.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드러누워 떼라도 쓰고 싶다. 그러나 참아낸다. 바닥으로 주저앉은 몸이 한참을 떨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긋불긋해진 얼굴을 한 손으로 누르며 샌즈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불룩한 점퍼 주머니가 거슬렸고 그 안에 자신이 감춰야 할 진실이 무거웠다. 빨리, 빨리 돌아가자. 샌즈는 걸음을 재촉했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짐을 싸자.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거야. 누구든 샌즈의 부재를 눈치 챌 때쯤이면 샌즈는 이미 그 자리에 없어야 했다. 이 사실을 숨겨야만 했다. 자신을 모체라고 가정했을 때 아빠라고 불러야 할 사람은 아이를 원치 않을 것이 분명했고 이 사실이 밝혀지면 당장에 샌즈의 목을 조를지도 몰랐다. 그 만큼이나 자신과 자신의 몸 안에 든 생명을 혐오할 것이 뻔했다.
아이의 목숨보다 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 샌즈는 복잡해진 머릿속을 비웠다. 아무도 그가 남자의 몸으로 임신을 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테니 속이는 것은 쉬울 것이다. 얼른 돌아가서 짐을 싸자. 그리고 숨을 죽이자. 눈 밖에 나도록. 티끌 같은 관심조차 사라지도록. 공원 화장실에서 나와 쓰레기통에 테스터기를 버리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유독 발걸음이 무거워 자꾸만 발이 엉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혼란 그 자체였다. 머릿속에선 온갖 생각들이 헛돌았고 앞을 바라보는 시야는 자꾸 흔들려 길을 찾지 못했다. 끔찍해. 자신의 목소린지 자신의 ‘상대’의 목소린지 모를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러게 끔찍하네. 샌즈는 작게 화답하고는 발을 질질 끌었다. 역겨워. 이번에는 분명하게 상대의 목소리가 울렸다.
왜 나는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야?
끝이 없는 절망과 원망이 새어나온다. 쭉쭉 끌려오는 발밑으로 검은 그림자가 원망을 쏟아냈다. 뒤꿈치에 대롱대롱 매달린 말들이 샌즈의 뒤를 쫓아오며 샌즈를 괴롭혔다. 왜 나는 이렇게 괴로워야만 하는 거야? 왜 누군가에겐 축복일 일이 나에겐 저주가 되는 거야? 너에게 닿는 것조차 쉽지 않으면서, 이 생명은 누굴 위한 거야? 너는 왜 나를. 뚝 끊어진 말끝에 뒤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몰라서 묻는 거야? 하고 분명하게 들려오는 환청에 화들짝 몸을 떨었다.
다시 눈물샘이 차오른다.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샌즈는 걸었다. 가끔 코를 훌쩍이기도 하며 걸었다. 집까지. 집까지 가면 눈물샘은 알아서 마를 테니까. 일그러진 얼굴조차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들이 둑이 터진 땜처럼 와르르 머릿속으로 몰려드는 것을 멈추지 않고 걸었다.
머릿속에 박힌 목소리가 자신을 향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공포심이 일었다. 몰라서 물어? 하는 그 말은 제법 익숙했고, 또 매번 들을 때마다 오싹한 질문이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모르고 있어. 자신에게 쏟아지는 멸시가 어떤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무엇 하나 알 수 없었다. 증오하면서도 놓지 않고. 원망하면서도 놓지 못하는 이 관계를 이해 할 수 없었다. 모든 관계와 질문의 끝은 언제나 도돌이표였다. 끝나지 않아. 끝낼 수 없어. 이 끝에 있는 건 나의 파멸뿐이야. 샌즈는 죽고 싶지 않아 끝을 맺을 수 없었다.
문 앞에 선 샌즈는 엉망이 된 얼굴을 훔쳐냈다. 이 시간이면 파피루스가 돌아와 있을 시간이었다. 적당히 숨을 고른다. 보지 않아도 빨개졌을 코끝과 눈시울이 걱정이 되긴 했지만 아마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샌즈는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다녔고 그의 동생은 요즘 새로운 일을 맡게 되어 정신이 없었다. 조용히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가면 모든 게 끝이었다. 샌즈는 점퍼 안으로 왼손을 쑤셔 넣고 문을 열었다. 기름칠이 덜 된 익숙한 소음이 귀끝을 스치고,
“다녀왔습니다.”
곧 끝을 맺을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