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 여누님이 나빴어
하. 이거 '골'때리는 새끼네.
샌즈는 까치집이 진 머리를 벅벅 긁다가 책상 위에 놓인 돈 봉투와 종이를 바라보았다. 딱 봐도 두툼해 보이는 돈 봉투와 그 위에 놓인 종이는 분명 잠들기 전까진 보지 못한 물건이었다. 옆으로 기울인 목에서 뚜둑하는 소리가 들린다. 오른손으로 뒷목을 슬쩍 쓸어내리며 목을 돌려 뻐근함을 풀어내던 샌즈는 살짝 구부정한 몸을 쭉 폈다. 살짝 열린 창 틈새로 봄바람이 살랑이고 노란 포스트잇이 하늘하늘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샌즈는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한 번 하고는 돈 봉투 위에서 팔랑거리는 포스트잇을 집어 들었다.
[please]
제발은 무슨.
하, 하고 콧방귀를 한 번 뀐 샌즈는 습관처럼 올라간 입꼬리를 손끝으로 쭉쭉 잡아당겨 내리고는 책상 밑에 달린 작은 카메라를 바라봤다. 손가락 한 마디만한 네모난 몸체와 곤충의 눈처럼 번들거리는 조그만 렌즈가 샌즈의 몸을 훑어 삼키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눈에 뛰지 않는 곳에 숨겨두는 노력이라도 하더니 이젠 제법 노골적으로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샌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카메라를 한 번 노려보다가 기지개를 쭈욱 켰다. 잠을 너무 오래 잤더니 온 몸이 뻐근하다. 포스트잇이 샌즈의 손 안에서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집 안 곳곳을 살펴봐도 자신의 방에 딱 한 대. 다른 사각지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침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책상 바로 밑자리에 번뜩이는 검은 눈동자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샌즈의 몸을 주시하고 있었다. 렌즈를 가려도 보고 한동안 방에 들어가지 않고 거실에서 잠들어 보기도 했지만 카메라 수가 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코지를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카메라를 부수거나, 버리거나 하는 식으로 손상을 가하면 그 다음 날 전 날보다 반짝반짝 거리는 신상 카메라가 하나 달려 있을 뿐. 이제는 공방전도 지겨워 적당히 렌즈 앞에 물건을 둬서 가리거나 하는 식으로 처리해 두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목적인지 어느 날부터 자신의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카메라 한 대는 이제는 더 이상 신경도 쓰이지 않을 만큼 익숙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젠 남창 취급을 해? 샌즈는 제 발밑에서 뒹구는 종이의 흔적들을 내려다보다가 책상 위의 돈봉투를 집어 들고 금액을 세어보았다. 생각보다 액수가 상당하다. 빳빳한 신권 여러 장이 샌즈의 손길에 따라 팔랑팔랑 날개짓을 했다. 조금 과하게 많을만한 돈. 화를 낼 생각이었는데 도리어 할 말이 없어진다. 샌즈는 방문을 살짝 열어 거실에 파피루스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뒤 까슬거리는 턱밑을 살살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걸 어떻게 할까.
아마도 일의 발단은 이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위화감을 향해 도대체 뭐가 목적이냐! 하고 지긋지긋한 질문을 되풀이 해보던 어제 저녁.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신의 트레이닝복을 찾던 샌즈는 의자를 앞에 둬 적당히 가리고 있던 카메라가 헐렁해진 이음새 틈새에서 반짝이는 걸 보았다.
까맣게 번들거리는 렌즈는 꼭 곤충의 눈동자 같다. 이렇게 앞을 가려도 사방 어디서든 자신을 주시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 가끔 의자를 치울 때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렌즈를 보면 잊고 있던 경계심과 함께 온 몸에 소름이 쭉 돋았다. 으. 샌즈는 트레이닝복을 움켜쥔 상태로 자신과 눈이 마주친 틈새를 노려다가 문득 기발한 장난거리를 생각해낸 악동처럼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였다.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을 했지.
카메라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눈앞의 광경을 담아야한다. 인간이 아니기에 눈꺼풀 덮거나 고개를 돌려 눈앞의 상황을 피할 수도 없었다. 보고 싶지 않은 광경까지도 그대로 담아 상대의 모니터 속으로 전송할 터였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게 하던 미지의 상대를 골탕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잘만 한다면 다시는 제 집에 발을 들이밀고 저 빌어먹을 카메라를 설치하는 일이 없어질지도 몰랐다. 동시에 미지의 상대에게 복수도 할 수 있고. 일석이조다. 샌즈는 자연스럽게 입 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생각한 바는 바로 실행하는 것이 좋다. 샌즈는 그대로 카메라를 가리던 의자를 치우고 작은 렌즈를 두터운 손끝으로 톡톡 쳤다. 잘 봐, 하는 것처럼 렌즈를 두어번 치던 샌즈는 그대로 침대 앞에 서서 옷을 벗었다.
꾸깃꾸깃한 티쳐츠의 밑 부분을 손으로 가볍게 말아 쥐고 천천히 들어올린다. 통 햇볕을 본적이 없는 피부는 형광등의 불빛 아래서 하얗게 반짝이고 동그랗게 살집이 잡힌 배 부분과 옆구리가 허하게 들어났다. 살집이 있는 몸 곳곳에 고된 생활로 붙은 근육들도 살짝 엿보인다. 평소와 달리 느릿느릿 벗겨내는 옷가지에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올 만큼 우스우면서도 속이 타 혀로 슬쩍 입술을 훑을 정도였다. 송곳니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상대를 골려줄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막상 누군가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샌즈는 그대로 옷을 들어 올리고 허리, 가슴, 목 부분에 걸쳐 겨드랑이 부분을 가볍게 통과해 옷을 벗었다. 허공에 드러난 몸이 찬 공기에 살짝 떨려왔다. 어쩐지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완벽하게 상의를 탈의하고 난 샌즈는 바지 버클 위에 올린 손을 머뭇거렸다. 상의까지야 흔하게 벗어재끼고 돌아다니기도 하는 법이라 그렇다고 쳐도 바지는 아무래도 조금 무리가 있다. 아무것도 모르고 훌렁훌렁 옷을 벗는 것도 아니고 명백하게 카메라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옷을 벗는 다는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게 스트립쇼와 뭐가 다른가 싶어 샌즈는 멈칫 손을 멈췄다. 그냥 포기할까? 이대로 멈추고 그냥 저 카메라를 부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요즘 너무 눈에 뛰게 노골적으로 바뀌던데.
샌즈가 제 몸을 내려다본다. 살집이 잡힌 몸은 보통에서 살짝 넘어 간지 오래라 흔히 말하는 아름다움의 미적 기준에서 벗어 난지 오래다. 자신이야 제 몸이든 얼굴이든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동생인 파피루스도 커다란 곰돌이 같다며 생각보다 좋아해주니 상관은 없지만 상대는 어떨까. 제 방에 설치한 카메라를 생각해보면 정신 나간 놈임은 분명하지만 제 몸뚱이도 어여삐 봐줄 인간일 것 같진 않았다. 다리털 숭숭 난 남자다리 훔쳐보는 취미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팬티바람으로 집안에서 돌아다니는 것도 한 두 번도 아니고 속옷만 안 벗는다면야. 샌즈는 다시 한 번 눈을 빛내며 가감하게 버클을 푸르고 지퍼를 내렸다.
-여기까지가 어제 있었던 일.
변태같은 놈이라고 생각했더니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변태였다. 자신의 행동이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불러오자 한참 생각을 마친 샌즈는 제 발밑에 흩어진 종이조각을 발로 슥슥 밀어내고는 서랍 안에 있던 파란 포스트잇을 찾아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렌즈가 눈을 번뜩이고 있을 의자의 등받이 부분에 자신이 적은 포스트잇을 척. 이제는 생각하기도 귀찮다. 이 정신 나간 변태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 잘난 면상을 꼭 한 번 눈앞에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Fuck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