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누님 커미션 전체공개
[파피샌즈] 잠은 다 잤나 봐요
“내가 형을 좋아하나 봐.”
확 달아오른 얼굴을 가린 손끝이 떨렸다. 뭐라고? 놀라 반문하는 소리가 생생한데 반응할 겨를이 없다. 제 입에서 튀어나간 말에 대한 반응을 해주어야 하는데 이제야 깨달은 감정의 이름을 되새김질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파피루스는 침을 삼킨다. 꿀꺽하고 흘러들어 간 침이 묵직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고 온몸엔 열이 올랐다. 좋아하나 봐. 세상에. 반고리관을 타고 흘러간 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분명히 들었던 제 목소리의 끝은 작게 갈라져 있었다.
파피루스는 그제야 모든 시간들을 되짚어 본다. 자신이 느꼈던 어색함과 간절함을 떠올려 본다. 하나둘 분명해지는 순간들을 떠올라 코끝이 간질거렸다. 그때 웃는 샌즈를 보며 가슴이 답답했던 건. 그 순간에 샌즈의 손을 잡고 말았던 건. 그건, 그러니까, 결국엔 내가. 아. 어쩌면 좋아.
숨을 삼켰다. 손틈새로 눈을 껌뻑껌뻑 뜨는 샌즈의 얼굴을 바라보던 파피루스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그랬다. 이제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샌즈의 하얀 머리카락도, 뭉퉁한 손끝도, 갈라진 입술도 자꾸만 눈에 밟혔던 이유를. 내가, 파피루스가, 샌즈를 좋아하고 있는 거야. 세상에.
미칠 것 같아.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샌즈는 여전히 놀란 얼굴이었고 파피루스는 여전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재치있게 들려와야 할 개그 소리도 들리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어색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빼꼼히 다시 손끝 사이로 나온 파피루스의 푸른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며 샌즈를 바라본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동글한 코끝.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니게 벌어져 버린 입술. 순한 눈매가 사랑스러운 제 형. 당혹으로 물든 얼굴이 평소의 웃음과는 달리 솔직하다는 생각이 들자 안달이 났다. 작게 벌어진 입술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애가 타 죽을 지경이었다. 단 한 번도 이렇게 간절하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파피루스는 비명을 삼켰다. 코끝과 입술을 쓸어내리던 손끝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나는 샌즈를 좋아해!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했던 말들의 의미가 지금처럼 간절했던 적이 있던가. 샌즈. 끝이 늘어지는 문장을 살짝 깨문 입술이 구깃해졌다. 보통 제 생각을 토해내기 바쁜 입술은 오늘따라 수많은 것들을 삼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반짝이는 눈동자에서 흘러나온 감정들이 파피루스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러대며 소리쳐댔다. 제 속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들은 전에 없을 만큼 열렬하고 열광적이라 감당할 수 없었다. 당장에라도 제 마음을 전해야 했다. 파피루스는 입천장을 살짝 혀끝으로 문지르며 소리쳤다. 샌즈, 내가,
“내가 샌즈를 사랑하나 봐!”
*
빛의 파편이 파피루스의 눈꺼풀 위로 내려앉는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열리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 파피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자리에는 지난밤의 여파로 피곤한 얼굴을 한 샌즈가 깊게 잠들어있었다.
살짝 찌푸려진 이마가 구겨진 옷자락 같다. 잠에선 깬 파피루스는 졸린 눈을 비비며 샌즈의 주름진 미간에 작게 입을 맞췄다가, 샌즈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리는 걸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파피루스는 지금의 관계가 좋았다. 작고 포동한 형의 옆구리를 만지작거리거나, 삐죽한 뒷머리에 얼굴을 묻을 수 있는 날들. 샌즈의 하얀 얼굴에 피가 몰리고 굵은 손마디가 어색함에 굽어가는 순간들을. 샌즈가 작게 몸을 비틀어도 제 품에서 벗어나지 않는 현재와 온전하게 저를 떠나지 않는 형이 좋았다. 고백 같지 않은 고백이 있었던 날 이후 차근하게 바뀌어 나간 형제 관계에 흡족함을 느꼈다. 샌즈가 여전히 망설이는 움직임을 보이긴 했지만, 파피루스는 이것이 금방 해결될 문제임을 굳게 믿었다.
파피루스의 몸이 익숙하게 샌즈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살결에 닿는 온기가 딱 기분 좋을 만큼 알맞았다. 폭신한 감촉도 딱 좋다. 햇볕에 바짝 말린 이불처럼 포근하고 따듯했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파피루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전에 이만큼이나 가깝게 샌즈를 만질 수 있었던 적이 있던가. 잦은 스킨쉽이야 예전과 다를 바 없었으나 형제 사이의 따듯한 포옹과 사랑하는 사이의 포옹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간질간질 올라오는 재채기에 온 마음이 들뜨는 기분이었다. like와 love의 차이를 깨달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파피루스는 혹 누군가에게 빼앗겼을지도 모를 특권을 마음껏 누렸다. 파피루스는 샌즈가 깨기 전에 말랑한 가슴팍에 얼굴을 마구 부비고 냉큼 목과 턱 끝에 키스했다.
“팝..”
“샌즈. 깼어?”
“응...”
그만해.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로 파고든다. 파피루스는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샌즈의 목에 진한 키스마크를 하나 더 남겨두려다 잠에서 깨어난 샌즈가 얼굴을 밀어내는 통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깨우지 그랬어. 졸린 목소리가 파피루스의 팔 안으로 떨어진다. 몇 시야..? 어느새 팔베개를 해주던 파피루스의 팔에 얼굴을 묻던 샌즈가 졸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평소보다 더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 조금 안쓰러웠다.
“8시 30분.”
“음..”
“오늘은 휴일이니까 좀 더 자도 돼!”
“아니.. 일어나서 해야 할 것도 있고.. 밥 먹어야지.”
이불을 조금 걷어낸 샌즈가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였다. 평소에도 아침잠이 많아 힘들어하는 샌즈가 안쓰러웠던 파피루스가 손을 뻗어 샌즈의 눈 위를 덮었다. 조금 더 자도 되는데. 샌즈 눈 부었어. 꾹꾹 눈꺼풀을 누르며 안마하듯 눌러준 파피루스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지 차분해진 목소리가 파피루스의 손등을 토닥였다. 피곤하면 낮잠 좀 자면 돼. 파피루스의 손을 쑥 밀어낸 샌즈가 가늘게 웃었다.
“좋아. 샌즈는 지금 많이 피곤하니까! 오늘만큼은 샌즈가 낮잠 자는 걸 허락해 줄게! 대신 저녁까지 자면 안 돼.”
“알겠어.”
“샌즈 이제 잠 깼어?”
응. 조금씩 잠에서 깨는듯한 샌즈를 바라보던 파피루스가 샌즈의 몸을 끌어안았다. 느린 맥박이 피부를 통해 고스란히 느껴지고 조용한 호흡이 몸을 진정시킨다. 목덜미에 코를 박으면 나는 옅은 살 내음이 좋았다. 나는 정말 샌즈를 좋아하고 있구나.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감정들을 몸으로 표출하며 파피루스는 샌즈의 몸을 끌어안고 침대를 뒹굴었다.
“샌즈으.”
“응.”
“나 뭐 물어봐도 돼?”
한참을 침대 위를 뒹굴던 파피루스가 빼꼼 고개를 든다. 한차례 샌즈의 몸 곳곳에 입을 맞추는 파피루스 탓에 숨을 헐떡이던 샌즈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파피루스를 살폈다. 뭔데? 파피루스의 파란 눈동자와 눈을 맞춘다. 샌즈는 파피루스의 표정이 영 좋지 못한 걸 깨달았다. 팝? 샌즈가 질문 대신 파피루스의 이름을 부른다. 파피루스는 제 이름을 부르는 샌즈를 바라보다가 시트 위를 더듬던 손으로 샌즈의 손끝을 잡았다. 파피루스는 서서히 얽혀 들어가는 손끝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얽혀든 손가락을 들어 샌즈의 손을 들어 올린 파피루스가 손안의 상처를 보며 속삭였다. 애정표현을 하다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제가 남긴 자국들이 어디어디에 새겨져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까 샌즈의 몸 여기저기를 살피느라 발견한 상처였다. 어제만 해도 없었던 상처니 새벽에 난 상처가 분명하다. 그때라면 한창 두 사람이 관계를 맺을 때인데. 파피루스는 격정적이던 순간 속에서 제 등을 긁는 대신 손을 움켜쥐던 샌즈를 떠올렸다. 관계에 넋이 나가 있는 동안에도 제 몸에 흉하나 남기려고 하지 않던 샌즈가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았다. 파피루스. 애타게 자신을 부르던 샌즈의 목소리에는 그 순간마저도 자신에 대한 염려가 담겨있었던 게 마음에 걸렸다. 마음이 무거운 듯 목소리가 절로 쳐졌다. 제가 좋아하는 만큼 샌즈도 자신을 좋아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식의 애정의 깊이를 확인할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파피루스는 샌즈가 자신과 동일한 곳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을 원했지 둘 중 누군가의 희생이나 감내로 이루어지는 사랑은 원하지 않았다.
“샌즈. 난 내가 아픈 것보다 샌즈가 아픈 게 더 싫어.”
살짝 굽혀져 있는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겹친다. 쭉 펴진 손바닥 안에 빨갛게 패인 다섯 개의 자욱들이 불만스러웠다. 파피루스는 땀이 베인 손바닥 안에 짧게 입을 맞추고 살짝 껍질이 벗겨진 상처를 핥았다. 혀끝에 느껴지는 상처 자국을 따라 짭짤한 맛과 함께 비릿 맛이 입안으로 고였다. 파피루스는 이를 세워 상처가 나지 않은 손바닥을 살짝 깨물고는 다시 그 위로 입을 맞췄다. 움찔 거리는 손끝이 간지럽게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따끔한 고통으로 샌즈가 작게 어깨를 움츠렸으나 파피루스는 멈추지 않았다. 아파? 웅얼거리는 목소리의 감촉만 선연했다.
쪽쪽. 짧게 입을 맞추고 상처 위로 혀를 덧그린다. 길게 손바닥 끝과 끝으로 훑어 올리는 혀끝이 느릿하게 손바닥 안을 배회했다. 조심스럽게 입을 맞출 때마다 움찔거리는 손끝이 제 얼굴을 밀어내려 할 때마다 파피루스는 더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상처를 핥아 치유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렇게 보기만 해도 아픈데. 잘근잘근 손바닥의 여린 살들과 손이 겹쳐진 손가락 사이를 혀로 훑은 파피루스가 입을 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깊은 입맞춤을 남기고 검지손가락 끝을 가볍게 물었다. 샌즈. 샌즈를 바라보는 눈동자 안에는 약간의 분노와 단호함이 담겨있었다.
“다음부턴 그러지 마.”
응? 처연하게 내려간 눈꼬리가 샌즈를 바라본다. 앞으로 안 그럴 거지? 하고 확신을 바라는 눈빛에 샌즈는 조금 숨을 삼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 몸을 꽈악 쥐어 잡히는 느낌이다. 언제 이렇게 자랐지. 꾹꾹 눌러두었던 부모 같은 감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어느새 훌쩍 큰 아이의 모습이 저를 놀라게 했다. 샌즈는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며 웃는 파피루스가 다시 기운차게 끌어안는 것에 숨을 삼키며 미약한 통증과 열기에 화끈거리는 손을 말아쥐었다. 아직도 손바닥 안에는 미끈거리는 타액과 감촉이 남아있었다. 다시 품 안으로 엉겨오는 몸짓은 여전히도 어린 아이 같은데, 언제부터 저렇게 어른스러운 얼굴을 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샌즈는 주먹을 쥔 손을 펴 파피루스의 등을 토닥이다가 벌게진 얼굴을 남몰래 파피루스의 어깨에 묻었다. 식사 내가 준비할 테니까 조금 더 누워있을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귀 옆에서 들려왔다. 샌즈는 작게 눈을 깜빡이다가 가벼워진 눈꺼풀을 깜빡이며 말했다.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 안이 화끈거렸다.
"아니. 괜찮아. 잠은 다 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