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감을 앞두고 있는 시간의 그릴비즈는 적막으로 가득했다. 한창 때의 소란스러움은 하나둘 무거운 몸을 누이기 위해 떠나는 괴물들과 함께 사라졌고 그릴비즈 특유의 따스한 온기와 불꽃 괴물의 적막만이 작은 펍(Pub)안에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릴비는 와인 잔을 닦던 손을 그대로 내려 눈앞의 괴물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릴비즈를 찾는 단골손님은 오늘따라 말수가 적은가 싶더니 느즈막한 시간이 되어 모두가 떠날 때쯤이 되자 따듯해야 할 펍 안의 온기가 낮게 가라앉을 만큼 무거운 침묵을 두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그릴비는 마침내 손 안에 들고 있던 수건마저 내려놓은 뒤 곁눈질도 하지 않고 괴물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희미한 바람 냄새에 섞인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평소의 웃음대신 침묵을 두르고 있는 괴물의 두개골이 오렌지 빛 조명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한참의 시선 끝에 왜?라고 묻는 듯한 얼굴이 그릴비를 향한다. 입꼬리는 여전히도 호선을 그리고 있는데 텅 빈 눈구멍에서 비실비실 세어 나오는 불빛은 평소와 달리 여린 빛을 하고 있다. 그릴비는 이런 눈을 할 때의 괴물을 알고 있었다. 말 못할 괴로움에 침몰해가는 자의 모습. 호흡 대신 눈물을 삼키고 웃음 사이로 한 숨을 흘려보낼 때의 눈빛이었다. 안경 너머로 가늘어 지는 눈 꼬리와 함께 그릴비가 뿜어내는 불빛이 조금 크게 일렁였다. 본래도 다른 괴물들의 안색을 살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그릴비였기 때문에 타인의 분위기나 상태에 대해서는 민감했지만 눈앞의 괴물에 한해서는, 특히나 민감했다.
“heh...”
그릴비는 괴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을 들썩였으나 괴물이 먼저 검지 손가락을 들어 탁자를 톡 두드렸다. 그릴비. 이번에도 먼저 말을 꺼낼 기회를 놓쳤다. 가죽도 근육도 지방도 없이 뼈만 남은 괴물은 그릴비 만큼이나 눈치가 빠르고 영리했다. 오늘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응? 내가 너를 찾는 이유가 뭔지 너도 알고 있잖아. 가늘어 지는 안광이 반쯤 접혀있었다. 반쯤 휜 눈과 입이 웃고 있는 모습을 만들고 있었다.
말이 혀끝을 맴돈다. 그릴비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벌렸으나 침묵은 둘 사이에 가장 많이 흐르는 대화법이었다. 그릴비는 작게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입을 다물어 수긍했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해골이 그릴비의 손등을 쓸어내린다. 착해. 마치 말 잘 듣는 동물을 칭찬하듯 쓸어내리는 손길에 그릴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긴 침묵은 다시 조용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릴비는 나머지 물건들을 정리하며 바테이블에 앉은 괴물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굳게 다문 입술 안에서 굴러다니는 수많은 말들이 감정들과 함께 엉켜들고 있었다. 한 번 엉키기 시작한 감정의 회로는 더 이상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당신은 잔인합니다. 왜 나의 모든 말들을 가져가고 말았습니까. 원망이 짙게 베어 나온 문장 사이로 슬픔이 눅진하게 녹아내렸다. 톡하고 터져 나올 것 같은 말들이 머릿속에 꼬리를 물고 헤엄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릴비를 입 안을 비집고 세어 나갈 것 같은 말들을 모두 눌러 삼켰다. 그는 언제나 침묵을 지키는 괴물이어야 했다. 그의 눈앞의 해골 괴물은 여전히 빈 잔 하나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샌즈.”
그릴비는 마지막 의자를 테이블 위에 뒤집어 올리고 나서야 괴물의 이름을 불렀다. 꾹꾹 눌러 담긴 목소리가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응.”
“오늘 자고 가겠습니까?”
“well.... 어쩌면 좋겠어?”
2.
뜨겁게 끓어오르던 정사의 끝에는 조용한 침묵이 끈적하게 말라붙어있었다. 그릴비는 작게 허덕이는 몸을 내려다보며 낮게 가라앉은 눈을 했다. 작다. 그렇게 작은 덩치가 아닌데도 제 품안에 안으면 충분하게 차오를 것 같은 육체는 언제나 작고 연약해 보였다. 좀처럼 태양빛에 그을리는 법이 없는 하얀 피부 탓인가. 아니면 요즘 들어 헐렁해지기 시작한 그의 옷들이 신경 쓰여서 일지도 몰랐다. 그릴비는 웅크린 몸과 태아처럼 작게 말아 쥔 손을 바라보다가 협탁 위에 올려둔 안경을 썼다.
하얀 거죽 아래 자리하고 있을 뼈가 툭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 날카롭게 도드라졌다. 그릴비는 작은 숨소리가 고르게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손을 뻗어 샌즈의 날개뼈를 매만졌다. 자신과 등을 지고 있는 작은 어깨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들썩이며 작은 파문을 만든다. 두껍게 가려진 커튼 사이로 아주 가는 빛 한줄기가 샌즈의 하얀 등줄기 위로 긴 손톱자국을 남겼다. 그릴비의 등 위에 새겨져있을 붉은 흔적과는 다른 빛의 흉터였다.
빛이 만들어낸 흉터는 샌즈의 몸을 종단하고 있었다. 간혹 작게 열린 창문 틈사이로 바람이라도 불면 빛이 가르는 손톱자국은 자신과 샌즈의 사이를 갈랐다. 자신과 샌즈를 나누는 빛의 경계가 얼마나 두터운지, 그릴비가 뻗었던 손을 거두고 조용히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다.
몇 개의 돌덩이와 회반죽을 사이로 나의 공간과 타인의 공간을 나눈다는 게 얼마나 기묘한 일인가 싶다가도 샌즈의 등 돌린 하얀 어깨를 바라볼 때면 그릴비는 타인과 자신의 경계를 나누는 행위가 얼마나 간단한 일인지 깨닫곤 했다. 지금도 창가 너머로 쏟아지는 가로등 불빛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뿐인데 둘 사이의 경계가 선명했다.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아주 가까운 거리인데도 등을 지고 눈을 감은 샌즈의 눈썹이 파르르 떨릴 때마다 그릴비는 외로움을 느꼈다.
서로의 마음은 그리 멀지 않은데. 타오르는 가슴이 요란스럽게 들썩일 때면 과묵하게 제자리를 지킬 줄 아는 그릴비 조차도 쉽사리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곤 했다. 이제는 그릴비도 샌즈의 등 돌린 하얀 뒷모습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탐색하기 위해 지겹고 지치는 공방전을 벌였고 큰 언성이 한 번 오가고 난, 어찌보면 별별 역경을 이겨낸 연인 사이였다. 그러나 모든 연인사이가 그러하듯 고통의 원인을 알고 있다고 해서 고통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닌 법이었다.
가끔 샌즈는 그릴비와 몸을 섞으면서도 눈앞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 두고 서로의 영역 안에 발을 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시트 위에서 작게 흐느적거리고 뜨거운 숨이 목을 타고 매달려도 샌즈는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타인과 자신을 나누는 것이 익숙한 상대의 아주 깊은 곳까지 파고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신은 여기 있어도 여기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그 기묘함을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묶어두는 것이 그릴비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발버둥이었다.
샌즈의 감긴 눈꺼풀이 피곤함을 담고 있다.
3.
그릴비는 더위에 힘들어하는 샌즈를 향해 손부채질을 했다.
뻘뻘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샌즈의 턱 끝에 힘없이 매달렸다가 주르륵 목을 흘러 하얀 셔츠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샌즈가 작게 셔츠를 퍼덕였다. 옷이 펄럭일 때마다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한 여름 바람이 샌즈의 펄럭이는 셔츠 사이로 쏙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하면서 샌즈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일그러진 눈가 위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가 뚝 떨어져 내렸다.
더워.. 샌즈가 혀를 쭉 빼고 앓는 소리를 내뱉는다. 꾹꾹 눌러 참다 터져 나온 목소리는 짜증도 섞이지 않을 만큼 지쳐있었다. 샌즈는 의식적으로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몸에 힘을 줬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이 썩 달갑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길 한복판에 쓰러지고 싶은데, 뜨거운 태양빛이 아프도록 살갗을 콕콕 찔러대는걸 보니 이대로 쓰러진다고 편해질 것 같지도 않았다.
"샌즈."
결국 샌즈의 옆에선 그릴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샌즈는 적당히 손이라도 내저어주려다가 그마저도 힘들어서 말없이 고갤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그릴비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힐끔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 힘이 없어 절로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힘들다면 돌아갈까요?"
나직하게 묻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대꾸할 기운도 없이 늘어지는 몸이 안쓰러워서 그릴비는 손을 뻗으려다 그만두었다. 옆에서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샌즈가 가여울 지경이었지만 이미 떠나온 길을 돌아가기에는 늦었고 목적지에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그릴비는 다른 말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으로 샌즈에게 손부채질을 하기로 했다.
본래도 여름이 다가오는 무렵이면 샌즈는 타오를 듯 한 태양열을 못 견뎌 무기력하게 늘어지는 일이 잦았다. 정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맘때쯤이면 작열하는 태양빛을 이기지 못하고 늘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나뭇가지에 결을 치는 것 보다 그 그림자 아래에 누워서 휴식을 취해야 하는 일이 더 많았다. 샌즈가 미로처럼 복잡한 정원 아주 깊숙한 곳 한구석에 겉옷을 깔고 그 위에 누워 잠드는 모습은 하루에도 두 세 번씩은 볼 수 있는 흔한 모습이었다.
직무태만에 가까운 일이었으나 그릴비는 굳이 샌즈를 탓하거나 면박을 주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샌즈가 생각보다 제 할 일을 잘해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일이 없었다. 샌즈는 아닌 듯 보여도 성실하게 제 역할을 다했다. 잡초를 뽑고, 제 멋대로 뻗어나간 나뭇가지를 치고, 손님이 오는 때에 맞춰 정원을 아름답게 꾸몄다. 요령도 실력이라고, 게으름을 부리는 것처럼 보여도 제 할 일은 전부 해내고 마는 것이 샌즈라는 사람이었다.
사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그릴비는 샌즈가 힘겹게 더위와 싸우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나무 그늘 아래 제 다리를 베고 누워있는 모습을 더 좋았기에 굳이 샌즈에게 면박 줄 일이 없었다. 사실 샌즈에게 정원사라는 그럴듯한 일을 맡긴 것도 그냥 샌즈를 제 곁에 두고 싶어서였으니 일을 못한다고 잘라버린 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샌즈가 아무리 게으름을 부려도, 길게 뻗은 나무가 빼죽빼죽 못난 모양을 해도, 그릴비에겐 샌즈가 건강한 게 우선이었고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이 소중했다.
샌즈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축축 쳐지는 몸이 땅과 가까워지기 시작할 쯤 마침내 목적지에 다 달았다. 그릴비는 급하게 손부채질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미리 와서 봐둔 곳이었지만 익숙한 곳이 아닌지라 자신이 봐놨던 자리를 찾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릴비는 자신이 자리를 찾는 사이에도 힘겨워하고 있을 샌즈를 위해 들고 있던 피크닉 가방에서 물을 꺼냈다. 마셔요.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느릿하게 뻗어온 손이 물통을 받아들고 숨을 골랐다. 하아. 높은 곳에 올라서자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다. 타들어가는 목에 수분이 들어가자 샌즈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 멀리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샌즈의 발간 볼을 식혀주었다.
데이트를 나온 것 까지는 좋은데. 날이 너무 안 좋았다. 샌즈는 여기서 말을 꺼내면 불만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조용히 그릴비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분주하게 제 자리를 찾는 눈길이 반짝이며 한 곳을 가리킨다. 찾았나. 멀지 않은 곳에 적당히 그늘이 진 고목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샌즈와 눈이 마주친 그릴비가 미안함을 담아 쑥스럽게 눈동자를 굴리더니 샌즈의 손을 잡아끌었다.
마침내 자리를 찾은 그릴비는 손등으로 땀을 닦아내는 샌즈에게 손수건을 건넨 뒤 적당한 고목 아래 돗자리를 폈다. 더위에 지친 샌즈를 쉬게 하려는 분주한 손을 바라보는 샌즈의 눈동자에 초점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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