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테일

조각

체리롤 2016. 9. 14. 00:38

왜썼는지 모르겠다



1

며칠 전에 파피루스의 생일이 있었다.

커다란 케이크와 친구들과 고른 선물 꾸러미를 들고 웃고 있는 파피루스는 평소보다 더 즐거워보였다. 파피루스는 그 날 신이나 집에서 가장 큰 냄비를 꺼내 평소에는 만들지 않던 크림파스타를 만들었다. 다행이도(혹은 파피루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집에는 시판용 소스밖에 남아있지 않아 파피루스는 열심히 면을 삶아 날랐다. 달콤한 생크림에 크림파스타를 잔뜩 먹은 파피루스는 그 날 밤 조금 고생을 하긴 했지만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낸 것 같았다.

파피루스의 생일이 지난지 며칠 뒤, 샌즈를 불러 앉힌 파피루스가 그제야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 파피루스의 선물로는 파피루스가 원하는 대로 새 컴퓨터나 전자렌지를 이용해 계란을 삶을 수 있는 찜기같은 것들을 선물했지만 이 날 파피루스는 아주아주 ‘특별한 선물’을 가지고 싶어했다. “위대한 파피루스님은 샌즈의 특별한 선물을 원하노라!” 잔뜩 들뜬 얼굴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샌즈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파피루스의 장단에 맞춰 고개를 주억였다. 특별한 거?

“샌즈는 상상 할 수 없는 아주아주 특별한 거!”

이번엔 또 어떤 걸 원하길래 그러는걸까. 샌즈는 신이 난 파피루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파피루스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파란 눈동자가 가늘게 접혀 보이지 않을 만큼 활짝 웃더니 샌즈에게 연필과 종이를 가져다 달라며 부탁했다. 샌즈는 방에서 낙서가 가득한 연습장 하나와 짜리몽땅해진 몽당연필을 가져왔다.

잔뜩 신이 난 파피루스가 연습장을 펼치더니 연필을 들고 무언가 써내려갔다. 크리스마스 때처럼 선물 목록이라도 적는걸까. 이번엔 또 어떤 비밀스러운 일을 벌이려는지 잔뜩 올라간 입꼬리가 씰룩였다.

“짠!”

고개를 번쩍 든 파피루스가 연습장을 쭉 내밀었다. 샌즈는 시선을 올려 파피루스가 건넨 연습장을 바라보았다. 연필로 죽죽 선을 그어 아홉칸짜리로 만든 종이 안에는 각각 포옹해주기, 씻기, 청소하기, 같이 퍼즐 맞추기, 양말치우기, 애완 돌 밥 주기, 뭐든지 들어주기, 같은 말들이 각 칸마다 적혀있었다. 그중 양말치우기는 무려 세 자리나 차지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파피루스?”

“쿠폰이야!”

“그건 아는데..”

샌즈는 방긋방긋 웃는 파피루스를 바라보며 조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이걸로 괜찮겠어? 특별한 걸 원했잖아.”

“샌즈! 이건 샌즈가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무조건 파피루스님의 부탁들어줘야만 하는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쿠폰이라고!”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뭐.. 어깨를 으쓱인 샌즈가 쿠폰에 그려진 작은 해골낙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걸로 게으름은 무리겠네. 웃음을 쏟아내는 샌즈를 바라보는 파피루스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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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즘 파피루스는 제 형제를 꼭 끌어안는 것을 새로운 취미로 삼은 듯 했다. 아침에 일어나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아침인사를 나눌 때도, 하루 일과를 위해 집밖으로 나서는 형의 등을 볼 때에도, 불꺼진 거실에서 제일 좋아하는 MTT 방송을 보며 깔깔 웃다가도 일과를 마친 제 형제가 돌아오면 냉큼 뛰쳐가 제 형을 끌어안았다. 동생의 과도한 애정표현에 샌즈는 난처한 얼굴을 짓곤 했지만 파피루스는 그것이 썩 마음에 드는 듯 했다. 파피루스. 샌즈가 난처한 얼굴을 하면 파피루스는 생글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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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형은 왜.

파피루스가 숨을 삼킨다. 혀끝까지 비죽 튀어나온 말 중에 자신이 내뱉을 수 없는 몇 개의 단어를 삼키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들리지도 않을 만큼 흐리게 퍼져나간 목소리가 끝을 맺지 못하고 떨어졌다. 파피루스의 말을 듣지 못 한 건지 포크를 챙기고 있던 샌즈가 파피루스를 향해 팝, 방금 뭐라고 했어? 라고 물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파피루스는 고개를 젖고는 전자레인지에서 막 꺼낸 스파게티를 건네며 웃었다. 샌즈가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웃는 낯으로 떠들기 시작하는 파피루스의 얼굴에 의구심을 지웠다. 다행인 일이다. 이번에도 샌즈는 파피루스의 말을 듣지 못했다. 입을 간지럽게 만드는 말들의 정체를 샌즈는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도 안되고. 이 정도의 판단력과 인내력은 파피루스도 가지고 있었다. 샌즈, 밥 먹자. 활짝 웃는 입꼬리가 떨렸다.

형은 왜. 단어가 끊어진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샌즈는, 형은, 너는. 왜. 끝에 닿지 못하는 질문들은 언제나 파피루스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샌즈는, 왜. 같은 질문이 반복해서 이어진다. 해답을 얻기 전까진 끝나지 않을 질문들은 깊은 곳에 묻어도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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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파피루스는 샌즈의 몸이 좋았다.

섹슈얼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샌즈의 몸이 좋았다. 쓸어내리면 손끝에 걸리는 조금 거칠한 살결도, 포근하고 따듯한 몸도, 굵지만 마디가 짧은 손도, 뭉퉁한 발도, 전부 다 좋아했다. 파피루스는 이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가 볼 수 있는 모든 구석구석과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모든 부분과 파랗게 반짝이는 눈동자 속의 비밀과 공허마저도 전부 다 좋아했으니까. 영혼을 꺼내 볼 수 없고, 정신을 꺼내 볼 수 없으니 제 눈에 비치는 사소한 습관과 외향이 그가 애정을 표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파피루스는 샌즈를 사랑하고 있었다.

또한 파피루스는 자기가 샌즈를 사랑하는 만큼 샌즈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가 받는 애정과 희생, 혜택은 샌즈의 사랑없이는 받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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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손끝을 쭉 펴 바라본 손 안에는 깊게 페인 상처가 남아있었다. 파피루스는 그것이 못내 안타깝고 또 사랑스러웠다. 열락의 밤에는 미처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다. 흉터나 상처, 마음이 삼켰던 후회와 괴로움 같은 것. 파피루스는 샌즈가 그런것들을 느끼지 않았으면 했다. 죄를 지었다는 배덕감은 샌즈의 것만이 아니었다. 죄를 지은 것은 여기 두사람이었고, 샌즈를 취한 것은 자신이었다. 파피루스는 샌즈를 사랑했고, 또 아꼈다. 그가 자신을 아끼는 것만큼이나 파피루스는 샌즈가 좋았고, 또 사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