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릴샌즈파피] Dark Paradise 上
*쿤님(@UNDER_Koon)의 검투사 샌즈 썰을 기반으로 썼습니다.
*공포 6,095. 공미포4,495
여기가 지옥인가.
그럼 저쪽으로 가면 천국인가.
무대 위의 경계선을 바라보며 소년은 여린 숨을 삼켰다. 몸을 짓누르는 무게감에 작은 몸뚱이는 비명을 지르는데 소년은 먼저 신음과 비명을 삼켜 누르는 게 익숙한 듯 입을 다물고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꽉 눌린 등이 아팠다. 잔뜩 비틀린 왼쪽 팔이 아팠고, 굳은살이 베긴 손바닥이 아팠다. 그래도 비명을 지르지 않을 것이다. 추하게 눈물을 쏟아내는 것이 아픔을 표현하는 길이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샌즈는 꽉 움켜쥔 칼을 휘둘렀다.
대충 휘두르는 칼에 상대가 맞을 리는 없어도 잠깐 동안 틈을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 샌즈는 상대가 당황하는 틈을 타 몸을 굴러 상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구를 때 자신의 손잡이에 왼쪽 손목을 얻어맞았지만 그 정도의 고통은 이겨낼 수 있었다.
노성이 샌즈를 덮쳤다. 도망가! 머릿속의 목소리가 속삭인다. 안 그래도 그럴 거야. 샌즈는 급하게 땅을 굴렀다. 제대로 자세를 잡을 틈도 없이 달려드는 공격에 정신이 없었다. 귓가에는 기쁨에 찬 환호성이 환청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먼지를 잔뜩 들이킨 입 안이 칼칼하다. 피가 스며든 침이 입가를 타고 뚝뚝 흘러내려 흙바닥을 적셨다. 웃는 건가? 무엇을 위해? 자신의 죽음과 남자의 승리를 위해서? 여기는 지옥인가, 저쪽은 천국인가. 저쪽이 천국이라면 자비의 손을 내밀어줘야지. 가엽은 사람들을 불구덩이로 내모는 것이 저들의 일인가? 내가 힘없는 자라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설움에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지만 현실은 여전히도 지옥이었다. 샌즈는 뒤로 몸을 물리고 물린 끝에 결국 잡혀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다리에 칼날이 파고드는 섬뜩한 감각을 온 몸으로 느껴야 하는 것은 끔찍했다. 뜨거운 불에 지지듯 생살을 파고 든 칼날은 뜨겁고 날카로웠다.
샌즈의 다리를 찌른 검은 다시 샌즈의 허벅지를 찍어 누르고 왼쪽 어깨와 팔뚝을 베었다. 노성을 지르며 분노한 만큼 눈앞의 상대는 샌즈를 봐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최대한의 고통과 최대한의 피. 뜨겁게 들끓어 오르는 관중들을 위한 쇼를 위해서 남자는 여린 몸 이곳저곳을 난도질했다.
아파!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눈앞을 뒤덮고 있다. 아파, 무서워! 아무리 어른스러운 아이라도 아이는 아이였다.
샌즈의 눈이 흐려진다. 고통으로 인한 실성도 설움으로 인한 눈물도 아니었다. 이건 순순한 공포였다. 샌즈는 겨우 13살에 검을 잡았다. 검을 잡아본 적도 없는 어린아이가, 갑자기 내몰린 현실 탓에 손에 검을 잡아야했다. 철로 만들어진 그것은 너무 무거웠고, 생명의 무게는 무서웠다.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죽음의 공포와 자신에게 향해드는 적의와 비웃음 이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어. 무서운 현실에 적응하는 방법 중 하나는 포기다. 이제 그만할래. 너무 무서워.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른다. 그런데도 샌즈는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을 깨물고 소리를 죽이는 건 이제 샌즈에게 너무 익숙한 일이었다.
죽여야 돼. 오른 손에 들린 검이 부르르 떨려왔다. 죽고 싶지 않으면 죽여야지. 안 그래? 피가 스며들 정도로 꽉 움켜쥔 검이 남자를 스친다. 쭉 뻗어 나간 검은 남자를 아슬아슬 하게 스치고 샌즈와 남자 사이에 거리를 만들었다. 샌즈가 검을 뻗은 것은 우연이었다. 본능이 샌즈를 움직였다. 하지만 샌즈는 다른 생각은 떠올리지 않았다. 운 좋게 찾아온 기회였다. 아직도 머릿속 한 켠에선 어린 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이번에는 본능이 내지르는 소리가 더 컸다. 죽여! 얼른, 얼른, 얼른! 죽여! 죽고 싶지 않아! 심장이 고동치고 온 몸에 힘이 돈다. 피가 빠르게 돌면서 열이 올랐다. 꽉 쥔 손과 꽉 다물린 입술에 턱이 저릿저릿 할 정도였지만 머릿속에 하얀 빛들이 눈앞을 희롱했다. 하얗게 물든 세상에는 남자의 심장을 꿰뚫는 자신의 검이 보였다. 얼른 죽여! 얼른! 얼른!
안타깝게도 힘껏 휘두른 검은 남자의 가슴을 베었을 뿐 목을 긋거나 가슴을 찌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미 한 차례 타는 듯한 긴장과 조바심에 물든 몸은 곧바로 다음 행동으로 몸을 움직였다. 샌즈는 지친 몸을 최대한 뻗어 남자의 발목을 베고 쓰러지는 남자의 몸에 재빨리 올라탔다. 그리고 일말의 자비도, 망설임도 없이 칼을 박아 넣었다.
싸늘한 정적이 칼끝을 타고 샌즈의 목 안까지 파고든다. 빠르게 타오르던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소리는 정적과 함께 찾아왔다. 생명이 사라지는 일은 눈 깜박할 사이였다. 그리고 샌즈의 죄책감과 공포는 그 찰나의 시간을 이길 수가 없었다. 죽음의 공포는 너무 컸다. 죽고 싶지 않아. 머릿속에 떠오르는 글자 그대로 떠올렸을 남자의 일그러진 눈동자가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샌즈는 비명 대신 숨을 삼켰다. 샌즈는 이제 그것이 너무 익숙해서 다른 행동은 할 수 없었다.
환호성이 샌즈의 몸으로 쏟아져 내린다. 안전한 곳에서 자신을 굽어보던 누군가가 샌즈의 승리를 알렸다. 쏟아지는 꽃가루와 어린 소년의 첫 승리를 높이는 말들이 농담처럼 쏟아졌다. 하하 웃는 목소리는 즐거운 쇼를 보는 관중들의 것이었다. 이게 즐거운 건가? 샌즈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물결치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하나 같이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밌는 건가? 샌즈는 입 꼬리를 끌어 올렸다.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꽉 틀어 막혀 있던 철창이 열리면서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샌즈의 어린 몸을 들어올렸다. 승자를 보여주기 위해 그들은 샌즈의 힘없는 몸을 높이 들어보였다가 죽어갈 듯 얕은 숨을 내뱉는 샌즈를 치료를 해야겠다며 검투노예들이 있는 작은 동굴로 그를 끌고 들어갔다.
남자들의 조심성 없는 손길에 끌려 들어가면서 샌즈는 자신의 검을 움켜잡았다. 생기가 사라지던 남자의 눈동자가 잊혀지지 않는다. 죄악감이 샌즈의 작은 머리통을 짓눌렀다. 샌즈의 그림자를 따라 온 감정이 샌즈의 머리맡에 선다. 아이가 비명을 지른다. 샌즈는 조용히 올린 입 꼬리를 고정시켰다. 손끝이 달달 떨려왔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선 찬바람이 불었다. 무서운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선 공포의 원인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포기는 불가능했다. 도망칠 수 없었다. 어린 감정들은 속 안 깊숙한 곳에서 죽어야 했다. 살기 위해서.
그래, 너를 위해서.
맞아. 나의 동생.
나의 팝.
너를 위해서.
소년의 나이가 이제 막 11살이 될 무렵이었다. 소년에게는 어린 동생이 하나, 사랑하는 부모님이 두 분, 그리고 작은 곰 인형이 제 세상의 전부 일 때의 일이었다.
소년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에는 또래 아이가 없었다. 그러니 소년은 제 어린 동생이 얼마나 사랑스러웠을지 말할 것도 없었다. 소년은 작은 제 동생의 손을 잡고 어디든 놀러다녔다. 산으로, 냇가로, 들판으로. 소년의 작은 다리와 어린 동생의 다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든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어린 장난을 쳤고, 즐거워했다. 그런 사소한 즐거움들이 소년의 목숨을 건지는 일이 되었다는 사실은 사실 별로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소년의 부모님은 대역 죄인이라고 했다.
죄목은 모르지만, 아마도, 왕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았다. 샌즈는 그런 일들은 잘 모른다. 그는 너무 어렸고, 또, 그의 부모는 그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또래 아이 조차 없는 산골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어야만 할 이유도, 일말의 자비도 없이 발견 즉시 목숨을 잃어야 했던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샌즈가 잠든 동생을 업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수많은 핏자국과 활활 타오르는 자신의 보금자리가 있었다.
그 다음은, 아, 그 다음은 어땠더라. 무섭게 생긴 아저씨들이 달려들었던가. 흠. 아니, 내가 그 아저씨들을 다 물리치고 어린 팝을 데리고 산 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가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르지. 음. 잘 기억이 나질 않는 걸.
샌즈는 뻐근한 몸을 일으키며 머리를 긁적였다. 꿈을 꿨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어린 시절의 꿈인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는 기억들은 별로 기억할 가치가 없는 것들이 분명했다. 샌즈는 까치집이 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꾹꾹 눌러 빗고는 주위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주어 입었다. 작게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옆자리에 누워있던 상대가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대로 팝이 있는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싶은데.
샌즈. 작게 부르는 소리에 헤, 하고 벌어진 입술이 그제야 상대를 불렀다. 아. 그릴비.
눈이 마주친다. 고개만 돌려 마주친 눈에는 분명 약간의 원망과 책망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샌즈는 으쓱 어깨만 움직이고 옷에 묻은 먼지만 툭툭 털어냈다.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 시선에 한 번 붙잡히면 평생 집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샌즈.”
다시 한 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샌즈는 앓는 소리를 냈다. 어쩔 수 없다. 남자는 샌즈의 손님이었고, 돈을 주는 사람이었고, 뒤를 봐주는 사람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남자는 지위가 높았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말 한마디면 샌즈는 쥐도 새도 모르게 지구상에서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거만하지 않았고 샌즈를 존중할 줄 알았으며, 또 자상했다. 그런 사람의 책망 섞인 눈초리를 견뎌낼 사람이 몇이나 될까. 으으으음... 샌즈는 앓는 소리를 내며 등을 돌려 남자를 마주했다. 아, 젠장. 그릴비.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데요.”
“아직은 당신이 필요합니다.”
“위대한 그릴비 장군이 잠투정이나 하는 어린아이는 아닐거라고 생각하는데.”
“위대한 남자도 연인의 키스는 필요한 법이죠.”
“연인 사이.. 입니까.”
“아닙니까?”
아뇨, 굳이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상관은 없지만. 샌즈는 그릴비의 옆자리에 앉았다. 책망으로 가득했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샌즈는 항상 이 눈빛이 견딜 수 없이 어색했다. 그렇게 보지 말아줘요. 혀로 미끌어 지려는 말을 눌러 삼킨다. 말로 한다고 해서 이해 못하겠지. 샌즈는 말 대신 그릴비의 입술에 입을 맞추기로 했다. 짧은 버드키스는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십쇼.”
“집에 토끼 같은 동생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 토끼는 이미 성인입니다.”
“제 눈에는 아직 어려요. 실제로도 어리고.”
“당신 눈에만 그렇게 보인다고 생각하진 않습니까?”
샌즈는 자신을 잡는 그릴비의 눈길을 슬쩍 피했다. 오늘도 동생이 일에 나가는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벌써 며칠째 같이 아침식사를 하지 못했는데. 어제는 그 덕에 잔소리까지 들었다. 으음... 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눈길을 피하자 그릴비가 짧게 한숨을 흘렸다.
“그럼 씻기라도 하고 가십쇼.”
그릴비로써는 최대의 타협안 이었지만 샌즈는 만족스럽지 못한 듯 보였다. 그래도 그 제안마저 거절했다간 이른 아침부터 땀을 흘리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샌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릴비는 다시 짧게 한숨을 흘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나오면 바로 갈 수 있게 마차를 준비해두겠습니다.
결국 샌즈가 마차를 타는 일은 없었다. 그릴비는 밤새 혹사당한 샌즈의 몸을 배려하려 했지만 샌즈는 잔뼈가 굵은 검투사였고(지금은 과거의 영광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하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몸의 편함 보다 주변의 시선이 쏠리는 그릴비 장군의 마차가 더 감수하기 힘들었다. 대신 샌즈는 그릴비에게 부탁해 간단한 식사거리와 돈 꾸러미를 받았다. 정당한 보수와 약간의 서비스. 언제나 정확하네요. ‘서비스’로 받은 식사를 들고 샌즈는 희희낙락 웃었다. 그릴비네 요리사는 실력이 좋았으니 어린 동생에게 맛있는 아침을 먹일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쁜 듯 했다. 그 모습을 그릴비는 조금 씁쓸한 듯 지켜보다가 샌즈가 떠나기 전, 말에 올라탄 샌즈의 손을 잡았다.
“오늘은, 해가 지기 전에 찾아가겠습니다.”
“....헤. 기쁘게 기다리고 있죠.”
오늘은 팝에게 일찍 퇴근하라고 해야겠다. 샌즈는 자신을 응시하는 그릴비를 바라보다가 그 볼에 입맞춤을 하고 웃어보였다. 샌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동생이었으나 눈앞의 남자가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아껴주는 남자가 싫을 리가 없었다. 그럼 이따가 봅시다. 샌즈는 가벼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릴비는 아쉬운 기색을 언뜻 내비췄으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